'트렁크'서 기간제 결혼 매칭 회사 직원 노인지 役으로 열연
"감정 절제하는 연기 좋아…나잇값 하는 어른 되고 싶어"
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연예계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도 많고, 이들을 팔로우하는 매체도 많다. 모처럼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대면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내용도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마저 소속사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현실에서도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느낌을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최수빈 기자] 배우 서현진은 '로코'(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가장 뛰어난 줄 알았더니 스릴러도 잘한다. 근데 이제는 미스터리 멜로까지 섭렵했다. 모든 시청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엄청난 흡입력을 가진 배우이지만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새로운 얼굴이 있다는 게 놀랍다. 이는 '트렁크'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많은 작품을 성공시킨 주역이기에 잘 아는 배우이지만 매번 서현진에게서는 낯선 얼굴이 발견된다.
서현진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극본 박은영, 연출 김규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극 중 노인지 역을 맡은 서현진은 "OTT 작품은 처음 해봤다. 기다렸다가 공개가 되니까 '짠-'하는 느낌이라서 되게 설렜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현진의 대표작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단연코 빠지지 않는 작품이 있다. 바로 2016년 방송된 '또 오해영'이다. '트렁크'에서 호흡을 맞춘 공유 또한 최근 제작발표회에서 "좋아했던 '또 오해영' 속 서현진을 만날 수 있는 기회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한 만큼 '또 오해영'은 서현진을 대중들에게 '연기파 배우'로 각인시킨 대표작이다.
하지만 서현진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 어떠한 작품도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또 오해영' 이후 '낭만닥터 김사부' '사랑의 온도' '뷰티 인사이드' '블랙독' '너는 나의 봄' '왜 오수재인가'까지. 서현진이라는 그 이름값 하나만 믿고 봐도 전혀 실망하지 않을 작품들의 향연이다.
어쩌면 서현진이 대본을 보는 선구안이 뛰어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대본과 작품을 고르는 눈이 얼마나 뛰어나다고 한들 그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시청자들의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작품의 흥행과 배우의 연기력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또 오해영'이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연기력으로 실망하게 하지 않는 서현진의 무한한 변신이 반갑다. 그 안에서도 서현진은 다 같은 '로코'라고 하더라도 캐릭터와 직업에 무한한 변주를 줘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얼굴을 각인시켰다. 이전 작품 속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게 하는 건 서현진의 연기력이 뒷받침됐다.
여기에 정점을 찍은 게 바로 '트렁크'다. '트렁크'는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인해 밝혀지기 시작한 비밀스러운 결혼 서비스와 그 안에 놓인 두 남녀의 이상한 결혼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멜로다. 총 8부작으로 지난달 29일 전편 공개됐다.
서현진이 맡은 노인지는 결혼 때문에 혼자가 된 인물이다. 결혼이 역겹다고 생각하면서도 결혼을 직업으로 선택한 그녀는 기간제 결혼 매칭 회사 NM 소속 직원이다. 네 번째 결혼을 마친 그는 다섯 번째 결혼을 준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음악 프로듀서 한정원(공유 분)과 만난다.
노인지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어떠한 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강단 있어 보이지만 때로는 연약하다. 자신의 상처로 인해 사람들에게 곁을 잘 주지 않는가 싶다가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갈 정도로 굉장히 온기가 넘치는 인물이다. 때로는 예민하지만 간결하기도 한 인물이다.
서현진은 이런 노인지의 복합적인 감정선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특히 작품 초반부터 끝까지 오묘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서현진의 나른한 표정 연기가 압도적이다. 서현진은 "그렇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웃었다.
"표정에 많은 힘을 주지는 않았어요. 인지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을 잘 돌보지 않아도 남을 위해서 싸워줄 수 있는 면을 보고 굉장히 상냥한 인물이라고 느꼈어요. 이 사람의 행동이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냥함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집중해서 보시지 않는 분들은 그냥 흘러간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작품과 결이 맞는 분들은 아마 재밌게 보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트렁크'는 작품 자체가 굉장히 미스터리하면서도 오묘한 분위기로 지속된다. 이에 시청자들의 강한 호불호가 있긴 했다. 하지만 서현진의 연기력을 두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호평했다. 그는 "작품을 찍을 때도 '이거 좋아하는 사람은 되게 좋아할 것 같고 아닌 사람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톤 자체가 어둡고 숨통이 트이는 구간이 없기 때문에 가볍게 하루의 마무리로 보실 드라마는 아니라서 피곤하게 느끼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인지라는 인물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대본이 정확하게 짜여 있지 않은 점도 좋았고 읽을 때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되는 부분이 달라져서 좋았어요. 나는 사실 yes로 말한 건데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인 것 같아요."
'트렁크'를 이끌고 가는 노인지 또한 미스터리한 인물이기 때문에 굉장히 오묘한 분위기가 극대화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노인지는 한정원을 통해 조금씩 상처를 치유하고 점차 마음의 문을 열며 감정을 키워간다. 특히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쉽게 웃지도 않고 늘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한정원과 데이트를 즐길 때는 찰나에 미소를 짓기도 한다. 이때 서현진 본연의 사랑스러움으로 단번에 분위기를 설렘으로 탈바꿈한다.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냉랭한 태도를 지녔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지니까 좀 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전반적인 분위기가 좀 부드러웠으면 안 그랬을 것 같은데 갑자기 탁 바뀌니까 부끄러웠어요. 굉장히 몸서리쳤던 기억이 있어요. 근데 공유 선배님이 그런 장면에서 스무스하게 잘 이끌어주셨던 것 같아요."
서현진은 대표작인 '또 오해영'을 비롯해 '사랑의 온도' '뷰티 인사이드' 등 다양한 '로코'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낸 만큼 '로코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로코'뿐만 아니라 '블랙독'처럼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부터 미스터리 장르인 '왜 오수재인가'까지 장르와 캐릭터에 변주를 주며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준 서현진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들의 공통점을 딱 하나 꼽자면 '상처'다. 서현진은 그간 내면의 상처가 있는 캐릭터들을 위주로 맡아서 그들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왔다. 특히 '트렁크'에서도 상처가 많았던 노인지가 점차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그는 "대본을 봤을 때 인물들의 상처가 잘 보이는 걸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제 안에 없는 걸 꺼낼 수는 없으니까 제가 공감할 수 있는 상처면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나이를 먹다 보니 감정을 절제하는 연기가 좀 편해지는 것 같아요. 한 번에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제가 그렇게 생각이 변하다 보니까 대본을 보는 시점도 바뀌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감정을 잘 표현하는 인물이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죠. 나중에 또 시간이 흘러서는 그런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떠한 작품이든 매번 서현진은 그 캐릭터와 완벽하게 동화된 모습을 보여줄뿐더러 새로운 얼굴을 꺼내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안긴다. '트렁크' 또한 서현진의 낯선 얼굴이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는 평이 자자한 만큼 그가 앞으로 또 어떠한 장르에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배우로서의 방향은 딱히 정해두지 않았어요. 그냥 좋은 대본을 만났으면 좋겠고 그 대본에 잘 얹혀서 흘러갈 수 있는 배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 외에도 제 삶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잇값 하는 어른으로, 제 나이를 잊지 않으면서 너무 철없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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