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김샛별 기자] 무려 22년 차의 경력을 자랑하는 배우임에도 '연기'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캐릭터를 쌓는 과정부터 작품을 대하는 태도까지 진지하고 깊은 답변을 내놓다가도 "연기가 뭘까요?"라는 투정 섞인 질문에는 "연기 어렵죠?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고 웃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연기를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배우 임철수의 진심과 애정이 묵직하게 와닿았다.
임철수는 최근 서울 마포구 <더팩트> 사옥에서 취재진과 만나 tvN 토일드라마 (극본 이강, 연출 박신우) 종영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극 중 냉철한 변호사 이충구 역을 맡은 그는 작품과 캐릭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관록이 있는 배우를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들곤 하는 감정이 바로 '기대감'이다.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경험치와 여기서 비롯된 연기관을 듣는 건 인터뷰어로서도 기자로서도 꽤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설레는 감정을 갖고 만난 임철수는 기대 이상의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미지의 서울'은 기자에게 있어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웃음과 감동 때로는 섬뜩함까지 느끼게 하며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던 임철수를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작품이 됐다.
지난달 29일 종영한 '미지의 서울'은 얼굴 빼고 모든 게 다른 쌍둥이 자매가 인생을 맞바꾸는 거짓말로 진짜 사랑과 인생을 찾아가는 로맨틱 성장 드라마다.
12부작의 여정을 마친 임철수는 "'미지의 서울'은 10개월 정도 오래 찍은 작품이다. 계절만 3개를 보냈다"며 "좋은 작품일수록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는 아쉽지만 시청자로서는 만족스러웠다"고 종영 소감을 밝혔다.
임철수가 이토록 작품에 대한 뿌듯함과 자부심을 드러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미지의 서울'은 내 삶에도 중요한 의미와 교훈이 됐다"며 "이러한 부분을 건드려주는 작품을 만난 게 천운으로 느껴질 정도다. 앞으로도 순간순간 작품의 영향을 받을 때가 있을 것 같다. 작품 이상의 기억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가치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있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인데 때로는 그 선택이 이분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 작품은 '틀리지 않다는 게 옳은 건 아니다'라는 말을 해요. 여기에서 나아가 '그렇다면 옳은 것이 선이고 그른 것은 악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덕분에 앞으로 살면서 일이든 사람 간의 관계든 어떤 선택을 할 때면 이 기준이 많이 적용될 것 같아요."
뿐만 아니다. 임철수는 작품의 투박한 메시지가 주는 진정성에도 마음이 울렸다. 그는 "일례로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라는 대사를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한다. 미사어구도 없는 세 문장에 평범한 우리네 삶이 들어있다"며 "다른 대사들도 그렇다. 비유와 은유를 섞지 않은 우리 근처에 있는 말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단순한 말인데 울림과 깊이가 느껴질 때가 많다. 대본이 나올수록 오히려 단순한 것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육룡이 나르샤' '미스터 션샤인' '사랑의 불시착' '빈센조' '환혼' 등 주로 장르물로 안방극장에 눈도장을 찍었던 임철수다. 때문에 일상물인 '미지의 서울'에서 변호사로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물론 장르와 캐릭터 결이 달라졌다고 해서 준비하는 것도 달라지진 않는단다. 다만 임철수가 떠올린 건 박신우 감독의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처럼 연기해도 된다'는 디렉팅이었다. 그는 "그만큼 실제처럼 연기 해달라는 것으로 해석했다"며 "오히려 좋았다. 밝고 유쾌한 캐릭터를 많이 맡았지만 개인적으로 내 성격은 진중한 편에 가깝다. 사실 웃기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진심으로 진지하게 웃긴 연기를 해야 코미디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진중함에서 출발하는 충구 캐릭터는 비교적 편안했다. 모든 힘을 빼고 교감과 소통에만 신경 쓰려고 했다"고 캐릭터 구축 과정도 전했다.
극 중 이충구는 재판을 위해서라면 상황과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후배 변호사 이호수(박진영 분)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은 그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이처럼 임철수는 단순히 악인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
임철수 역시 이충구를 연기하며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에서 고민이 있을 때도 있었단다. 그렇게 이해가 안 될 때는 오히려 이호수와의 관계성에 보다 더 집중하며 이충구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에 임철수는 "이를 위해 오히려 이충구의 전사를 러프(대략적인, 대충)하게 잡았다. 구체적으로 서사를 쌓게 되면 오히려 현재의 액션이 줄어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금 더 열어두고 매 장면 안에서 바뀌게끔 자율성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제 역할은 관계성이 가장 중요했어요. 충구라는 캐릭터를 여러 가지로 소개하지만 전 '호수와의 관계'가 다라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더욱더 현장성에 맡겼어요. 관계라는 걸 따로 준비할 수는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래서인지 호수 역의 진영 배우와도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안 했어요. 믿고 맡기면 되는 배우가 있는데 진영이가 그런 결이었죠. 제가 계획 없이 가는 액션도 다 받아주는 배우였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느 작품이든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며 여기에 설득력까지 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우려나 부담은 없었을까. 임철수는 생각 외의 명쾌한 해답을 내놨다. 그는 "당연히 매 연기 고충이 있다. 다만 '입체적'이라는 단어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입체적'이라는 것에 함몰되면 오히려 입체적만을 위한 연기가 될 것 같았다. 입체적이라는 건 현상이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와 이를 보는 시청자가 느끼는 체감이라고 생각한다"며 "대신 주어진 대본 안에서 즉흥성을 유발하고 변주를 주기 위해 조금 더 신경을 썼다"고 전했다.
이쯤 되니 임철수가 평소 생각하는 연기에 대한 지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더욱 멋있는 건 후배라고 해도 현장에서 의지하고 믿는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과 실제 현재 연기 선생님 역시 자신보다 어리다는 점이다. 이에 임철수는 "나보다 많이 알면 선생님이지 않나. 배움에는 끝이 없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배움에 과연 나이라는 게 상관있을까 싶다"고 전하며 웃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동료 배우들과 연기 스터디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임철수다. 과연 그에게 '연기'란 어떤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임철수는 "나 역시 여전히 연기를 정의하는 건 어려운 것 같다"며 "연기는 삶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연기를 한다. 일례로 배가 고프면 우는 척을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추상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류와 가장 밀접해 있어서 오히려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미지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전 '미지의 서울'을 두고두고 많이 볼 것 같아요. 좋은 책을 집에 두면 언제든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우리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OTT라는 게 잘돼 있으니까 많이 꺼내볼 것 같아요. 여러분들에게도 평범한 책 같지만 소중함을 지닌 소소한 보물 혹은 정답이 써 있는 일기장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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