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 아닌 산업 수단으로 고착화
구조적 재검토 필요한 때

K팝은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가 밀접한 음악 산업이다. 음악 외에도 팬사인회, 라이브 방송, 메시지 앱을 통해 '친밀함'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꽤 중요한 일이 됐고 이는 K팝 글로벌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 친밀함은 때로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감정 노동이며 많은 아이돌들이 공황, 불안, 번아웃을 호소한다. '사생'도 정서적 밀착 관계의 부작용 중 하나다. '팬을 위한 헌신'이라는 미명 아래 정서적 피로를 감내하는 아이돌들의 현실과 산업적·문화적·심리적 딜레마를 짚어 봤다. <편집자 주>
[더팩트 | 정병근 기자] 감정을 콘텐츠화하고 정서적 친밀감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K팝 시스템이 아티스트에게 과도한 정서적 부담을 안긴다는 지적은 수년 전부터 제기돼 왔다. 그럼에도 업계는 근본적인 구조 개편에 여전히 소극적이다.

베이비몬스터 라미, NCT DREAM 런쥔, NCT WISH 리쿠, 드림캐쳐 시연, ITZY 리아, 아이브 레이 등 여러 아이돌이 컨디션 난조로 활동을 중단하거나 장기 휴식을 거쳐 복귀했다. 부상 등 신체적인 문제일 때도 있지만 심리적, 정식적 문제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긴장, 공황, 불안, 번아웃으로 활동을 멈춘 아이돌이 속출했다. NCT, 세븐틴, 트와이스 등 인기 그룹 멤버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돌 멤버들의 정서적 탈진은 K팝 산업 전반의 구조적 징후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K팝 산업은 감정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음악적 완성도와 퍼포먼스뿐 아니라 무대 밖에서 팬과의 정서적 교류 역시 중요한 업무로 간주된다. 팬 플랫폼, SNS, 라이브 방송 등은 아티스트가 일상 속 감정을 공유하고 팬과 관계를 유지하는 창구로 활용되며 이는 강력한 팬덤 형성과 직결되는 K팝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 반복되고 점차 의무로 변질되면서 아티스트가 느끼는 심리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일상 공유나 팬과의 실시간 소통이 루틴화되면서 감정 표현은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팬과 소속사의 기대에 따라 정해진 시점에 제공해야 하는 일종의 '감정 스케줄'로 전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팬덤 내 소통 빈도와 정서적 반응은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나 태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로 인해 아티스트 간 비교와 해석 경쟁까지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이처럼 외부로부터 기대와 평가가 내면의 감정까지 통제하려 들 때 발생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 이중 과업은 결국 자기표현의 위축으로 이어져 감정의 진위 자체를 검열하게 만든다. 심리적 피로는 자연스레 누적된다.

정서적 피로는 단기 휴식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실제로 활동 중단 이후 복귀한 아티스트 중 일부는 플랫폼 사용을 최소화하거나 활동량을 조절하고 있다. 팬들과의 직접적 교류를 줄이는 방식으로 정서적 거리를 조정하고 있다. 밴드 데이식스 도운은 지난해 10월 "어떻게 해야 개인적으로 더 건강하게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며 팬 소통 플랫폼 사용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자구적 생존 전략일 뿐 산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진 못한다.
물론 감정 노동만이 아티스트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K팝의 글로벌 확산은 활동 무대를 해외까지 넓히며 스케줄을 폭증시켰고 실력의 상향 평준화는 라이브 무대와 안무, 콘셉트 소화까지 높은 강도를 요구하게 됐다. 하루 수차례의 리허설, 시차 적응 없는 이동, 생방송 직전까지 이어지는 일정은 신체 피로는 물론 심리적 압박으로도 연결된다. 팬과의 정서 교류는 이 고강도 노동 환경 위에 얹힌 또 하나의 감정적 과업일 수 있다.
한 중견 기획사 관계자는 "팬 플랫폼이나 콘텐츠 일정은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아티스트의 정서 상태보다 운영 효율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있다"며 "예민한 문제인 만큼 회사 내부에서도 공식적인 시스템을 만들기보다 개인 의지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일부 대형 기획사는 전속 심리상담사나 정기 심리 진단 체계를 도입하고 있으나 이는 산업 전반의 기준이 되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중소 기획사의 경우 아예 심리 관련 지원 체계가 없거나 문제 발생 이후에야 개입이 이루어지는 후속 대응 수준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K팝이 산업으로서 세계적 규모와 영향력을 갖춘 지금 더 이상 아티스트 개개인의 감정 노동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감정 표현이 진심의 증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퍼포먼스로 변질되는 지금의 구조는 아티스트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정신 건강을 잠식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K팝의 핵심 자원이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의 내면을 소진시킬 수 있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특히 팬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플랫폼이 이미 다수 기획사의 직속 또는 계열사 소유인 상황에서 아티스트는 그 운영 구조 안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버블, 위버스 등 주요 팬 플랫폼은 각각 SM엔터테인먼트와 하이브의 자회사에서 개발 및 관리되고 있다. 이 같은 구조가 결국 감정 노동을 개인의 자율이 아닌 산업의 수단으로 고착시키고 있는 셈이다.
정서적 안정과 자율성을 전제로 한 소통 구조, 그리고 감정 표현에 대한 제도적 보호 시스템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감정 노동을 둘러싼 구조적 재검토 없이 K팝은 아티스트의 침묵과 번아웃을 반복하는 고리를 끊기 어렵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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