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인터뷰] 이영애, 고통과 비례하는 희열


'헤다 가블러'로 32년 만에 연극 무대 복귀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앞으로도 새로운 작품 찾을 것"


배우 이영애가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을 기념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LG아트센터 배우 이영애가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을 기념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LG아트센터

[더팩트|박지윤 기자] 하나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늘 도전적인 행보를 보여줬던 배우 이영애가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돌아왔다. 그는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 위에서 오롯이 헤다로서 존재하며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영애는 지난 7일부터 LG아트센터 서울-LG SIGNATURE 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극 '헤다 가블러'에 참여하며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다. 5회차 공연까지 무사히 마친 그는 13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더팩트>와 만나 "공연을 잘 보셨길 바란다. 몇십 년 만에 하는 거니까 떨리고 아쉬운 면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문을 열며 작품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전했다.


6월 8일까지 공연되는 '헤다 가블러'는 사회적 제약과 억압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여성의 심리를 다루는 작품으로, 1890년 발표된 헨리크 입센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며 리처드 이어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버전을 바탕으로 한다. 주인공 헤다 역을 맡은 이영애와 함께 김정호 지현준 이승주 백지원 이정미 조어진이 '원 캐스트'로 출연 중이다.

이영애는 아름다우면서도 냉소적이고 지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헤다 역을 맡아 극을 이끈다. /LG아트센터 이영애는 아름다우면서도 냉소적이고 지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헤다 역을 맡아 극을 이끈다. /LG아트센터

헤다는 입센의 작품 중 가장 극적인 역할 중 하나로 현시대까지도 여전히 강렬한 비극의 아이콘으로 손꼽힌다. 여성 햄릿이라고도 비유되는 캐릭터인 만큼 어떤 배우가 해당 역할을 맡는지 자체만으로 화제 되는 가운데, 이영애가 1993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개관작 '짜장면' 이후 3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와 공연 전부터 많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과연 그는 '헤다 가블러'의 어떠한 지점에 끌렸을까.

"연극의 묘미를 갖고 있었는데 영화와 드라마에 집중하고 아이들의 엄마로 살다 보니까 못했어요. 그러다가 헨리크 입센 전집을 완역한 대학원 은사님을 축하해주는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헤다 가블러'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배우로서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또 '벚꽃동산'을 보면서 이런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고요. KBS2 '은수 좋은 날'을 마치고 공연 기간과 타이밍도 맞았어요. '헤다 가블러' 세계 초연이 1월 31일이었는데 그날이 제 생일이거든요. 혼자서 해야된다는 이유를 되뇌었어요(웃음)."

물론 선택하기까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극 무대는 두렵게 다가왔고 많은 대사량을 틀리지 않고 소화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관계자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빈 무대에도 올라가 보면서 약 한 달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그리고 현재 호평 속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이영애는 "가격도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 감사한 마음뿐"이라며 "첫 공연 때는 '대사만 까먹지 말자. 훌륭한 배우들에게 누가 되지 말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스로는 아쉬웠다. 조금 더 발전하고 무대를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영애는 배우로서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를 결심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LG아트센터 이영애는 "배우로서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를 결심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LG아트센터

1990년에 데뷔한 이영애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봄날은 간다' '친절한 금자씨', 드라마 '대장금' '사임당 빛의 일기' '구경이' '마에스트라' 등 수많은 대표작을 통해 여러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대체 불가한 배우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동안 수없이 자신의 연기를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예상치 못한 현타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단다. 이를 극복하고 낯선 연극 무대에 적응하기 위해 이영애가 택한 방법은 발성과 무대 연기 등 테크닉적 측면을 새롭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연습 영상을 봤는데 저만 이상한 거예요. 현타가 와서 잠을 못 잤고 아침 일찍 연습실에 가서 혼자 고민을 했어요. 선생님인 제 친구와 배우들에게 배우면서 서서히 힘을 얻어갔어요. 집과 극장만 오갔죠. 제가 매체 연기만 했다 보니까 모든 관객에게 제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껴요. 큰 무대에 맞는 액팅을 늘 고민하죠."

힘든 만큼 희열을 느끼면서 그동안 몰랐던 무대 연기의 매력에 흠뻑 빠진 이영애는 "무대를 만들어가는 묘미가 크다. 또 저를 향하는 조명이 스며드는 감정 폭의 깊이가 꽤 크다. 공부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특이한 무대가 인상적인 공연이다. 거대하면서도 미니멀한 무채색의 기하학적 공간으로 구성됐으며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구조는 헤다가 갇힌 집이자 그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또한 정면 무대는 때때로 대형 스크린으로 전환돼 라이브캠으로 이영애의 연기를 송출하며 헤다의 심리 상태와 정서를 극적으로 드러내며 몰입도를 높인다.

"극장이 크니까 뒷자리의 관객들은 저를 잘 못 보잖아요. 카메라 연기를 많이 한게 저의 강점이라서 내면의 심리를 잘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새로운 재미를 가미하면서 긍정적으로 재밌게 하고 있어요."

이영애는 중심은 배우지만 다양하게 일하고 재밌게 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LG아트센터 이영애는 "중심은 배우지만 다양하게 일하고 재밌게 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LG아트센터

헤다는 아름다우면서도 냉소적이고 지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작품 속 헤다는 비극적인 희생자나 충동적인 인물이 아닌 자기 삶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존재하고 직접적이고 간결한 표현으로 인물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다.

입센의 성향과 북유럽의 날씨 등에 관한 강연을 들으면서 인물을 이해한 이영애가 바라본 헤다는 '가스라이팅 잘 될 수 있는 아바타'이자 '날아가고 싶지만 날 수 없는 풍선'이었다. 그는 "항상 갈망하는 디오니소스였을 것 같고 죽음으로 또 다른 해방의 출구를 찾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영애의 해석은 의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인물과 관계를 맺지만 누구와도 잘 어울릴 수 없는 색을 가진 여자이기에 보라색 의상을, 바지를 입기에는 겁이 많고 치마만 입기에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진 여자이기에 치마바지를 선택했다고.

1890년에 쓰여진 글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와 맞닿아있는 게 작품의 매력 포인트다. 이영애는 "120년 전 결혼제도를 벗어나려는 헤다의 마음이라기보다 직장 스트레스 등 넓은 관점에서 봐도 좋을 것 같다"며 "같은 여자 입장에서만 작품을 보면 해석이 좁아지겠더라. 현대 사회에서 갇혀있는 우리의 굴레에서 생각하면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것 같다. 솔직히 굳이 자살해야 됐을까 싶었는데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였다"고 덧붙였다.

우아하고 단아한 이영애는 대중이 바라보는 자신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으면서 전형성을 벗어난 캐릭터를 많이 만나왔다. 그리고 '헤다 가블러'로 또 한 번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해나가는 중이다.

"힘들지만 많이 배웠고 공부했어요. 다음 연극을 할 때는 더 열심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그동안 제가 너무 쉽게 한 게 아닌가 반성도 하면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은 안 되겠지만 배우로서 새로운 작품을 찾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다양하게 일하고 싶고 중심은 배우지만 재밌게 살고 싶어요."

jiyoon-1031@tf.co.kr
[연예부 | ssent@tf.co.kr]

  • 추천 22
  • 댓글 12


 

회사 소개 | 서비스 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의견보내기 | 제휴&광고

사업자 : (주)더팩트|대표 : 김상규
통신판매업신고 : 2006-01232|사업자등록번호 : 104-81-76081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성암로 189 20층 (상암동,중소기업DMC타워)
fannstar@tf.co.kr|고객센터 02-3151-9425

Copyright@팬앤스타 All right reserved.